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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리뷰

쿠니키다 돗보 외, 『잊지 못할 사람들』

by leitz 2017. 5. 19.

  일본 근대 작가 16인의 단편집. 첫 번째 단편인 류노스케의 <귤>은 매우 짧지만 매우 긴 여운을 남기는 작품. 아, 이렇게 짧아도 충분히 좋은 소설, 여백이 넓은 소설을 쓸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 밖의 기억에 남는 작품들. 모리 오가리의 <다카세부네>, 요코미쓰 리이치의 <아내의 화원>, 이즈미 교카의 <외과실>, 아리시마 다케오의 <비겁자>, 기쿠치 칸의 <출세>.


저는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그저 동생 얼굴만을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이런 때에는 희한하게도 눈이 말을 합니다. 동생의 그 눈은 “어서! 어서 해!”라며 원망스럽게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마치 큰 바퀴 같은 무엇이 빙빙 도는 것 같았습니다만, 동생의 눈은 무시무시한 재촉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원망하는 듯한 그 눈빛이 점점 험악해지더니, 나중에는 철천지원수라도 노려보는 것같이 저주의 눈빛으로 바뀌어 버렸습니다. 보다 못한 저는 결국은 동생이 원하는 대로 해 주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저는 “알았어. 빼 줄게.” 했습니다. 그 한마디에 동생의 눈빛은 편안하다 못해, 마치 기뻐하는 듯한 눈빛이 되었습니다.

(<다카세부네> 중)


동생을 죽인 혐의로 감옥에 가게 되는 기스케라는 남자. 사실 그는 병을 앓다 필시 죽을 수밖에 없었던 그의 동생이 형을 위해 자결을 시도한 직후 기스케가 그를 발견, 동생의 몸에 박힌 칼을 빼내 주었다. 하필 그 장면이 목격되어 죄를 뒤집어쓴 것이었다. '이런 때에는 희한하게도 눈이 말을 합니다.' 말을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눈이 말을 하고,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눈이 먼저 말을 하기도 한다. 혹은 손이 말을 하기도 한다. 작가는 묻고 있다. 고통에서 꺼내 주려고 동생의 목숨을 끊는 데 도움을 준 형. 그는 죄인인가. 


<아내의 화원>은 죽어가는 아내, 그리고 아름다운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아름다운 죽음이라니. 


<외과실>은 참 독특한 작품이었다. 가슴에 종양이 있어 수면마취를 하고 수술을 해야 하는 부인이 극구 수면마취를 거부한다는 이야기. 수면마취를 하게 되면 말할 수 없는 비밀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중얼거리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걸 거부하는 거란다. 극심한 고통, 심지어 목숨과 바꾸어도 말할 수 없는 비밀이라니. 내게도 그런 것이 있기는 한 것일까. 


일본 작품들(책이나 영화, 드라마)을 보다 보면 인간의 악마적 본성에 주목하는 것들을 적잖이 접하게 된다. 아리시마 다케오의 <비겁자>도 또한 그렇다. 


우유병이 마구마구 쏟아져 나와 아이의 가슴을 때리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이의 겉옷과 땅 위에도 흰 액체가 흘러 퍼졌다. 

이렇게 되자 그의 마음은 다시 변했다. 도와주는 사람 하나 없는 아이의 상황을 딱하게 여기는 마음은 어느새 사라지고, 우유병이 쉴 새 없이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것을 마치 재미있는 구경거리라도 보듯 보고 있었다. 

실제로 거기에 있는 역동적인 움직임과 소리에는 어떤 악마적이라 할 통쾌함이 있었다. 파괴라는 것에 대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괴한 흥미. 이런 광경은 그런 흥미를 자극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좀 더 격렬하게 모든 병이 한꺼번에 와르르 흩어져 모든 것들이 산산조각이라도 난다면…….

그런데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앞문이 ‘쩍!’하며 입을 크게 벌려 버렸다. 삼단 선반이 밀려 나온 혀처럼 땅바닥에 미끄러졌다. 그리고 그 위에 지겹도록 수북이 쌓여 있던 우유병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져 깨지거나 부서지며 흩어졌다. 

(<비겁자> 중)


인간 내면에는 악마적 속성(까지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타인의 고통을 잠시나마 즐기는 속성)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사람은 비겁한 것을, 불의를 싫어하는가보다. 소년이 처한 난처한 상황을 구경거리라도 되는 듯 보기만 하는 이들에 대한 분노, 그 분노는 어쩌면 스스로에 대한 분노일지 모른다. 


너무나 긴장되어 침을 삼키는 소리가 ‘꿀꺽’ 하고 울렸다. 그때는 이미 이웃에 사는 어른들까지 뛰쳐나와 기막힌 얼굴로 수레와 그 가엾은 아이를 보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사건의 뒷수습을 처리해 주려는 사람은 없었고 이 일에 연관되는 것 자체를 귀찮아 하는 듯 보였다. 

그 딱한 모습을 보고 그는 더욱 조바심이 났다. 갑자기 뛰어들어가 그곳에 있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패 주고, 영문을 몰라 하는 어른과 아이를 힐끗 쳐다보며 ‘바보! 당샌들은 겁쟁이, 바보다. 비겁자다! 이 아이가 평소에 장난을 좀 쳤다고 지금도 장난을 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런 장난이 아이가 할 수 있는 장난인지 아닌지 생각해 봐라. 불쌍하게도……. 어떻게 하다 보니 일어난 실수다. 나는 아까부터 여기서 모든 것을 쭉 보고 있었다. 병신 같은 녀석들! 빨리 배달부를 불러와!’ 하고 실컷 몰아붙이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우물쭈물하면서 ‘이제 뛰쳐나갈까, 이제 뛰쳐나갈까?’ 하고 두 팔을 떨며 핏기 없는 얼굴로 서 있었다.

(<비겁자>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