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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리뷰

사카구치 안고, 『백치, 타락론 외』

by leitz 2017. 4. 2.

사카구치 안고의 글은 이 책 외에 <<사카구치 안고 산문집>>도 읽어 보았습니다. 둘 다 최정아 교수가 번역한 것인데, 번역이 둘 다 좋았습니다. 안고는 다자이 오사무 등과 함께 전후 일본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이죠. 개인적으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앞부분은 조금 밋밋해서 재미가 없었는데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 <타락론>, <속 타락론>, <한바탕 마을 소동>,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는 다 읽기 아까울 만큼 재미있게 읽었어요. 


내가 오늘날 사람을 보고 첫눈에 좋고 싫음과 신용, 불신용을 결정할 때 기준으로 삼는 것이 이 슬픔의 소재 여부다. 이는 지극히 위험천만한 방법이며 그 때문에 사람을 잘못 보는 경우도 심심찮으나, 어차피 모든 일에는 일장일단이 있으며 완전한 것은 없는 법. 기준이라는 것을 어디에 맞춘다 해도 기껏해야 기준에 지나지 않을 뿐이 아닌가. 나는 다만 나의 이 기준이 아버지에게서 느낀 반감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생겨난 것임을 알고서, 한 사람을 이루는 생의 둘레라는 것이 실로 좁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했고, 인간은 태어나서 오늘날까지 경험한 자신의 작은 생의 둘레를 정밀하게 생각해내고 다시금 그 의미를 되새길 필요가 있음을 통감한다. 나는 오늘날 정치가나 사업가 타입의 사람, 어린아이의 슬픔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반발을 느끼고 한 발자국도 양보하기 싫은 기분이 되지만, 이 슬픔의 그림자가 늘 붙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조금의 경계심도 없이 마음을 터놓고 말하고 싶은 것을 모두 이야기하며 작은 울타리도 만들 줄 모른다. 

(<돌의 생각> 중)


슬픔이 있는 사람, 에 대한 믿음, 참 인간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겉보기에 문제 없고 당당해 보이기만 하고 부족함 없어 보이는 사람, 이 되고 싶은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게 가당키나 할는지요. 사실 모든 사람을 잘 살펴보면 누구에게서나 모종의 슬픔을 발견할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안고가 이야기하는 슬픔은, 애써 숨기려 하거나 애써 당당해 보이려 하는 이의 슬픔이라기보다는 그저 감출 수 없는, 자신도 어쩌지 못하는,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감출 수 없는 슬픔이 아닐까 합니다. 


다자이 오사무의 <<나의 소소한 일상>>에서처럼, 안고 또한 시대정신의 한계 같은 것을 보여주고 있어요. 천황제를 비판하는 대목을 시대정신을 극복한 것이라 본다면 여성에 관해서는, 대체로 여성을 대상화하고 몰자아화한다는 느낌을 받아요. 이 점은 <나는 바다를 껴안고 싶다>에서 단적으로 드러나요. 여성을 육욕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서 더 나아가지 못하고 있어요. 


인간과 인성의 올바른 모습이란 무엇인가. 원하는 바를 솔직하게 원하다 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하는 것, 요는 그뿐이다. 좋아하는 것을 좋아한다 말할 것, 좋아하는 여자를 좋아한다 말할 것. 대의명분 혹은 불의에 대한 금제(禁制), 의리와 인정이라고 하는 거짓된 옷을 벗어버리고 적나라한 마음이 되어보자. 이 적나라한 모습을 규명하고 응시하는 것이 인간 부활을 위한 제일 조건이다. 거기서부터 자신과, 인성의 진실한 탄생과 새로운 출발이 비롯된다. 

(<속 타락론> 중)


이 대목은 다자이 오사무의 생각과도 많이 통하는 것 같아요. 좋고 싫음, 사실 그걸 무시하고 그 이상무엇을 논한들 진실되다고 할 수 있겠어요. 어쨌든 이 점(좋고 싫음)에 기반하지 않으면 제아무리 그럴듯한 이야기라도 허위에 기반한 것 아닐까요. 

또 한 가지 신선했던 것은 아름다움에 관한 그의 이론이었어요.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상태로 끝나게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은 작고 약한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심정이라 하겠으며, 내 조카딸의 경우 역시 자살 따위는 하지 말고 끝까지 버티고 살다가 지옥에 떨어져 암흑의 황야를 방황하기를 바랐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나 자신이 자신에게 짐 지운 문학의 길은 그와 같은 황야 유랑의 길이지만, 그럼에도 아름다운 것을 아름다운 상태로 끝나게 하고 싶다는 작은 바람을 지워버리지 못한다. 그러나 사실 미완의 미는 미가 아니다. 그것이 당연히 떨어져야 할 지옥에서의 편력, 그 윤락 자체가 미일 수 있을 때 비로소 미라고 부르게 될 터이다. 

(<타락론> 중)


한때 저도 '아, 이쯤이면 죽어도 좋겠다. 지금 죽는다면 그런대로 깔끔한 인생이 될 것 같다, 더 산다면 어쩌면 구질구질해질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누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안고는 그걸 비판하고 있어요. 그건 미완의 아름다움이다. 미완의 아름다움은 아름다움이 아니다, 미완의 아름다움은 작고 약한 인간한테나 어울리는 것이다, 라고. 

역시 저는 작고 약한 인간인 것일까요. 잘 모르겠어요. 어쩌면 구질구질할지도 모르는 삶까지 더해야 진정 아름다운 삶이 될 것인가. 


<벚나무 숲 속 만개한 꽃그늘 아래>는 무척 재미있게 읽었어요. 멈추지 못할 만큼. 사람 없는 만개한 벚꽃 그늘은 과연 무서울 것도 같아요. 그 이미지를 배경으로 벌어지는 엽기적이기까지 한(사실 죽은 자의 머리를 노리개로 삼아 노는 여자의 엽기성과 같은 것은 전혀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우화는 정말 우화였어요. 현실의 여러 문제를 빗대어 담고 있었어요. 남자의 여자에 대한 집착과 여자가 조종하는 남자, 그런데 마지막에 여자가 남자를 따라 다시 산에 들어간다고 한 것은 남자인 저로서는 조금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여자는 남자를 버리고 도시에 남을 줄 알았거든요. 여자가 남자를 따라 다시 산에 들어갔던 것은 여자가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일까요. 남녀 관계의 한 전형을 잘 담고 있다고 생각되면서 일본스러운 오묘한 분위기(다소 섬뜩하기까지 한)와 다소의 엽기성이 어우러진, 그러나 끝까지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