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선생이었던 남자는 곤충도감에 자신의 이름을 곁들인 새로운 곤충 모형을 수록하는 꿈을 안고 어느 날 모래 무더기가 있는 마을로 갔다가 그만 그곳에 갇혀버립니다. 모래 구덩이는 현실이고 바깥 세상은 꿈이 되어버렸어요. 그리고 모래 구덩이에서 만나 함께 살게 된 여자.
읽어갈수록 이 이야기는 현실에서 출발해 우화가 되어갑니다.
그는 이번 휴가에 대해서 몹시 은밀한 태도를 취했고, 동료 중 누구에게도 일부러 행선지를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도 그저 말을 안 한 것이 아니라 의식적으로 수수께끼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잿빛 일상에 피부색까지 물들어 가고 있는 그들을 약올리기에는 더없이 유효한 방법이었다. 회색 종족은 자기 이외의 인간이, 빨강이든 파랑이든 초록이든, 회색 이외의 색을 지녔다고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견딜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진다. (95면)
과연 사람들은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에서 탈출한 이들을 동경하는 것 같습니다. 빨강이 되었든 파랑이 되었든 회색 인간은 회색 아닌 무언가를 동경한다고 생각해요. 빨강의 서글픔, 파랑의 고초 따위는 회색 인간은 생각할 겨를이 없죠. 일단 회색 아닌 것 자체가 중요하기 때문일까요.
물론 그 역시 순수한 성관계를 꿈꿀 만큼 낭만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그런 것은, 아마도 죽음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낼 때나 필요한 것이다……. 시들어가는 조릿대는 서둘러 열매를 맺는다……. 굶주린 쥐는 이동하면서 피투성이의 성교를 반복한다……. 결핵 환자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섹스에 몰두한다……. 그 다음에는 계단에서 내려오는 수밖에 없다……. 탑의 꼭대기에 사는 왕이나 지배자는 오로지 할렘의 건설에 정열을 기울인다…….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군인들은 한시를 아까워하며 자위에 심취한다……. (133면)
128면에 보면, 남자가 탈출을 위해 여자와 부삽 쟁탈전을 벌이다가 문득 남자와 여자의 동물적 본능에 충실해지려는 순간 여자가 이런 말을 하죠.
"하지만, 도시의 여자들은 모두 예쁘겠죠?"
다소 뜬금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어쩐지 이해가 되기도 했어요. 어쨌든 정말 결핵 환자는 빠짐없이 섹스에 몰두할까요? 갑자기 궁금하네요.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간을 포함한 동물은 과연 종족 번식이라는 본능(이랄까 욕구랄까, 혹은 숙명일지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거죠. 이 사실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이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조금 서글퍼지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이 사실을 기만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기도 하고요.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
하지만 뭐 어때요, 또 확실한 한 가지는 인간은 그 본능의 영역 안에서만 삶을 영위하지는 않는다는 것. 그것으로 위안을 삼는 수밖에. 이 소설에서 지속적으로 문제 삼는 게 그것인 것 같아요. 극한의 상황, 원초적 본능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지만 인간은 그런 극한 상황에서만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것.
막상 일을 시작해 보니, 생각했던 것만큼의 저항감은 느껴지지 않는다. 이 변화의 원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물 배급이 중단될까 봐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여자에 대한 자책감 때문인가, 아니면 또 노동 자체의 성격 때문일까? 과연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 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있는 모양이다.
언제였던가, 뫼비우스의 띠가 같이 가자고 하여 무슨 강연을 들으로 간 적이 있다. 강연 장소는 낮고 녹슨 철책으로 빙 에워싸여 있고, 철책 안은 종이 쓰레기와 빈 깡통과, 그 밖에 정체모를 천 조각 같은 것으로 땅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설계자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것을 설치하였단 말인가? 그러자 그의 의문을 비쳐내듯 철책 위로 몸을 구부리고, 손가락으로 열심히 철책을 비벼보는, 낡은 양복 차림의 남자가 있었다. 저 사람, 사복 형사라고 뫼비우스의 띠가 나직한 목소리로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강연장 천장에는, 그때까지 본 적이 없을 만큼 커다란, 커피색 빗물 자국이 있었다. 그 라애서 강사가 이런 말을 하였다.
<노동을 극복하는 길은 노동을 통해서만 찾을 수 있습니다. 노동 자체에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동으로 노동을 극복하는…… 그 자기 부정의 에너지야말로 진정한 노동의 가치입니다.>(153면)
정말로 노동을 극복하는 건 노동뿐이란 말인가, 그것이 노동의 진정한 가치일까. 그럴 수도 있겠죠. 노동에는 '목적지 없이도 여전히 도망쳐가는 시간을 견디게 하는, 인간의 기댈 언덕 같은 것'이 정말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어떤 분이 "아침 수업 시간에서 초탈하는 방법은(늦을까봐 걱정하는 압박을 떨쳐내는 방법, 이라고 이해했어요) 훨씬 일찍 오는 것"이라 말씀하신 기억이 납니다. 그 말을 들을 당시에는, 오.. 철학적인 뭔가가 있는 것 같다, 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수업 시간에 늦지 않으려 훨씬 일찍 오는 것 역시 그 압박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의 고통(혹은 노동해야 한다는 압박?)에서 초탈하는 방법은 자발적으로 노동을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노동에서 자유로워지는 것 아닐까요. 일을 하고 싶을 때 하는. 일을 하기 시작했는데 하다 보니 이게 괴롭지가 않아, 재미도 좀 있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했네? 뭐 이런?
지각의 압박에서 해방되는 방법은, 수업 자체에 얽매이지 않는 것일지도요. 세상엔, 꼭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 않으면 큰일이 나는 일이란 별로 없는 것 같아요.
남자는 키들키들 웃으면서 신발을 벗었다. 과연 시간은 옆으로 흐르는 것인 모양이다. 신발 속에 고인 모래와 땀이 견딜 수 없어진 것이다. 신발을 벗고 발가락을 벌리고, 바람을 쏘인다. 그건 그렇고, 동물의 집은 어찌하여 이렇게 지독한 냄새가 나는 것일까! …… 동물한테서 꽃향기가 난다고 해서 나쁠 것은 전혀 없을 텐데……. 아니, 이건 내 발 냄새다……. 그렇게 생각하니 갑자기 친밀감이 솟구치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다……. 누구였던가, 자기 귀지만큼 맛있는 것도 없다, 본고장의 치즈 이상이라고 말한 인간이 있었던가……. 그 정도는 아니지만, 썩은 이의 냄새 같은 것에는 아무리 맡아도 싫증나지 않는 고혹적인 무언가가 있다…….(172면)
이건 무슨 악취미란 말인가, 하고 처음엔 생각했는데 그러고보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자기 귀지를 먹어볼 생각을 한 이가 있다니. 상상력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해야 하나요? '본고장의 치즈 이상'이라니, 어떤 맛일지 조금은 상상이 되고 마는군요. 남에게는 정말 역겨운 것인데 자기 것이라 친밀하고 소중한(?)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겠죠.
왜 이렇게 어둡단 말인가……. 이미 온 세상이 눈을 감고 귀를 막고 있다……. 이미 나는 죽어가고 있는데, 아무도, 돌아보지조차 않는다! 목구멍 속에서 푸르르 떨고 있던 공포가 갑자기 터져나왔다. 남자는 입을 쩍 벌리고, 짐승처럼 외친다.
<살려줘!>
늘 정해져 있는 말! …… 아무렴 어떠랴……. 다 죽어가는 판에 개성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나. 판으로 찍어낸 싸구려 과자 신세라도 좋으니, 아무튼 살고 싶다! (192면)
이것 역시 극한 상황에서의 인간 존재의 자명한 한계라고 할까, 나약함이라고 할까 그런 것을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 같습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의연한 사람은 과연 훌륭해요. 또 그 문턱에서 절규하며 발버둥치는 사람은 애처롭고(하지만 결코 못났다거나 그런 생각은 들지 않아요).
우리는 모래 구덩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곳을 빠져나갈 궁리를 하고, 어느새 희망은 깊은 모래 속에서 하루 4리터의 물로 솟아오르지만, 우리에겐 자궁외 임신을 한 자신의 여자가 있고 이제 모래 구덩이 밖으로 나가는 걸 제지받지 않아 바람도 쏘일 수 있기에 급하게 서두를 일도 없습니다. 내일이라도 떠날 수 있죠.
그러나 결코 떠나지 못하리라는(않으리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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