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장인물
나 : 초상화로 생계를 이어가다가(나름 재능이 있어서) 산속에 머물며 제법 예술다운 예술을 하게 되는, 그러면서 신비로운 일을 겪게 되는 36세의 남자.
유즈 : 나의 아내. 어느 날 갑자기 이혼을 통보한, 건축사무소에 다니는 여자. 33세.
아마다 마사히코 : 90세가 넘어 요양원에서 혼돈의 정신 속을 헤매는 저명한 일본화가. 젊었을 적 서양화를 전공하며 오스트리아 빈에 유학할 때 반나치 운동을 하다가 연인을 잃고 일본으로 귀국. 귀국 후 일본화가로 전향하여 성공.
아마다 도모히코 : 아마다 마사히코의 아들. 나의 미대 동기. 내게 마사히코의 집에 살 것을 권유. 그림은 그만두었지만 그림 보는 안목은 누구보다 뛰어나다.
와타루 멘시키 :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내가 머무는 집에서 보이는 호화로운 대저택에 살며 유한생활을 즐기는 백발의 매력적인 중년. 피아노 연주도 하고 예술에 대한 조예도 제법 있다.
아키가와 마리에 : 멘시키 씨의 딸일지도 모르는 13세 소녀.
아키가와 쇼코 : 마리에의 고모. 나중에 멘시키와 사귄다. 예의 바른 40대 초반의 여자.
미치코 : 나의 여동생. 병으로 열세 살에 죽었다. 나와 제법 친하게 지냈던.
하루키의 소설은, '읽는 맛에 읽는다.' 읽는 맛에 읽는다는 것은 뭔가 새로운 세계의 새로운 이야기를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키의 세계의 하루키의 이야기를(물론 소설마다 주인공도 다르고 모티프도 다르지만) 읽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꼭 이야기가 어떻게 흘러가도 딱히 문제될 게 없다. 하루키 씨는 자신만의 분위기를(그가 말하는 '오리지널리티') 소설 속에 잘 담아내는 재주가 있다.
미대를 졸업하고 초상화 그리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주인공이 갑작스레 아내와 이혼하면서(일방적으로 이혼당하면서) 동북 지방과 홋카이도를 차로 오랫동안 여행하고는 오다와라의 산속 외딴 집에 정착하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된다. 주인공이 살게 된 집은 저명한 일본화가 아마다 도모히코가 살던 집. 그의 작업실에서 나는 멘시키 씨의 초상화를 성공적으로 그려 큰 사례금을 받고 그와 한밤의 방울 소리를 공유한다. 방울 소리의 정체를 알기 위해 그 소리가 나는 구덩이(돌무덤)를 파헤치고 결국 그곳에서 기사단장 이데아가 나와 내 눈에 현현한다. 이로부터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나와 멘시키, 멘시키와 마리에, 나와 유즈, 나와 마리에, 나와 도모히코, 멘시키와 쇼코 등등의 관계가 복잡하게 얽히고.
하루키의 소설에서는(적어도 직전의 1Q84에서는) 현실 세계와 비현실 세계,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가 이어져 있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특히 주인공은 그 두 세계를 넘나든다.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 그래서 전혀 이해가 안 되거나 하지는 않았다. 꽤 긴 분량인데도(2권을 합하면 1천 페이지가 넘는 듯) 재미있게 읽었다. 다만 비현실세계를 통과하는 대목에서는 조금 집중도가 떨어지기도 하였다.
멘시키는 나를 부러워한다. 왜냐. 나는 부러운 사람이 없기 때문. 멘시키는 그런 나를 부러워한다. 부러워하는 사람이 없는 사람. 자기에 집중해서 자기 삶을 만족스럽게 느끼는(혹은 만족스럽도록 컨트롤하는) 사람. 분명 매력적인 사람이다. 나 또한 부러운 사람이 없는 것 같다, 싶다가도 멘시키가 조금은 부럽다.
멘시키가 부러운 것은, 그가 돈이 많아서, 혹은 대저택에 살아서, 아니면 비싼 차를 네 대나 갖고 있어서는 아니다. 그가 부러운 이유는 일주일에 한 번씩 청소 업체에서 집으로 찾아와 청소를 해준다는 것, 그리고 한 달에 한 번 전문가가 찾아와 자동차 광택을 내준다는 것.(결국 그것도 돈이 있으면 되는 것인가) 뭐 많이 부러운 것은 아니고.
고희의 나이를 앞두고, 하루키가 이런 역량을 발휘한 작품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 스스로 말해온 것처럼 육체와 정신을 다잡아오는 데 소홀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대개 작가도 그렇고 학자도 그렇고 인생의 어느 한 순간 '반짝' 하는 때가 있고 그 시기를 지나면 글에 힘을 잃기 쉬운데 하루키는 그렇지 않다. 정련된 문장(번역도 괜찮았다)과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힘이 여전히 뛰어나다.
그렇다면 멘시키는 그녀를 잃은 것을 후회하는가? 물론 그렇지 않다. 그는 지난 일을 뒤늦게 후회하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다. 자신은 가정생활에 적합한 인간이 아니라는 점을 멘시키는 잘 알았다. 아무리 사랑하는 상대일지라도 타인과 일상을 공유할 수는 없다. 그는 매일 고독한 집중력을 필요로 했고, 그 집중력이 누군가의 존재로 인해 흐트러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누군가와 함께 생활한다면 언젠가 그 사람을 미워하게 될지 모른다. 그 상대가 부모이건, 아내이건, 아이이건, 그는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그는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을 두려워했다.(1권 238-239면)
과연 나 또한 그렇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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