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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詩

이정록, 뒷짐

by leitz 2015. 6. 6.


뒷짐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

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

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

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

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

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

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

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

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

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

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

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

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

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

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

밀쳐놓은 빈손 위에

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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