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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詩22

복효근, <어머니의 힘>과 <빈집> 복효근 시인의 시집 『꽃 아닌 것 없다』를 읽었다. 다 읽고 나서 시가 끝나 키득키득거린 시도 있었고 읽고 나서 시가 끝나지 않아 뭉클뭉클거린 시도 있었다. 2018.10.16 어머니의 힘 어머니 비가 억수로 내려요 냅둬라 냅뒀다 비가 그쳤다 빈집 큰딸 집에 간 할머니 지난겨울 죽은지도 모르고 마당엔 동백꽃이 한창 2018. 10. 16.
장석남, 가을볕 가을볕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이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2018. 10. 2.
장석남, 三월이 오고 三월이 오고 장석남 3월이 오고 또 저녁이 오네 열두 겹으로 사랑이 오네 물 이랑이 밀고 오는 것, 물 이랑이 이 江岸을 밀어서 내 앉은 자리를 밀어서 나를 제 어깨에 초록으로 앉히고는 일어서 가는데 불이 한 점이 켜지고 또 꺼지고 목련이 정수리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는데 처음의 서늘한 입맞춤이 조금씩 더워지고 더워지고 3월이 오고 꽃밭마다 꽃이 와 앉고 잎이 솟고 솟고 열두 겹 사랑이 오네 조금 더 작아져서 살아갈 일을 우리는 이마에 물들이네 초록 이마로 물들이네 2018. 3. 20.
복효근, 매미 매미 복효근 울음 수직으로 가파르다 수컷이라고 한다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울음뿐이었을 때 그것도 한 재산이겠다 배 속이 투명하게 드러나 보이는 적빈으로 늘 난간에 매달려 기도 외엔 속수무책인 삶을 그대에게 갈 수 있는 길이 울음밖에 없었다면 믿겠나 7년 땅속 벌레의 전생을 견디어 단 한 번 사랑을 죽음으로 치러야 하는 저 혼인비행이 처절해서 황홀하다 울고 갔다는 것이 유일한 진실이기라도 하다면 그 슬픈 유전자를 다시 땅속 깊이 묻어야 하리 그 끝 또한 수직이어서 깨끗하다 (『따뜻한 외면』) 2017. 8. 3.
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문정희 가장 아름다운 것은 손으로 잡을 수 없게 만드셨다 사방에 피어나는 저 나무들과 꽃들 사이 푸르게 솟아나는 웃음 같은 것 가장 소중한 것은 혼자 가질 수 없게 만드셨다 새로 건 달력 속에 숨 쉬는 처녀들 당신의 호명을 기다리는 좋은 언어들 가장 사랑스러운 것은 저절로 솟게 만드셨다 서로를 바라보는 눈 속으로 그윽이 떠오르는 별 같은 것 (『양귀비꽃 머리에 꽂고』) 2017. 7. 20.
이문재, 봄날 봄날 이문재 대학 본관 앞 부아앙 좌회전하던 철가방이 급브레이크를 밟는다. 저런 오토바이가 넘어질 뻔했다. 청년은 휴대전화를 꺼내더니 막 벙글기 시작한 목련꽃을 찍는다. 아예 오토바이에서 내린다. 아래에서 찰칵 옆에서 찰칵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나 찰칵찰칵 백목련 사진을 급히 배달할 데가 있을 것이다. 부아앙 철가방이 정문 쪽으로 튀어나간다. 계란탕처럼 순한 봄날 이른 저녁이다. 2017. 4. 8.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도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보인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2017. 2. 23.
천양희, 배경이 되다 배경이 되다-천양희 새벽이 언제 올지 몰라 모든 문 다 열어놓는다고그가 말했을 때 꿈꿀 수 있다면 아직 살아있는 것이라고내가 말했다나에게만 중요한 게 무슨 의미냐고내가 말했을 때 어둠을 물리치려고 애쓴다고그가 말했다생각의 끝은 늘 단애라고그가 말했을 때 꽃은 나무의 상부에 피는 것이라고내가 말했다세상에 무늬가 없는 돌은 없다고내가 말했을 때 나이테 없는 나무는 없다고그가 말했다바람이 고요하면 물결도 편안하다고그가 말했을 때 산은 강을 넘지 못한다고내가 말했다더이상 할말이 없을 때우리는 서로의 배경이 되었다(너무 많은 입, 창비) 2017. 2. 6.
천양희, 너에게 쓴다 너에게 쓴다-천양희 꽃이 피었다고 너에게 쓰고꽃이 졌다고 너에게 쓴다.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길이 되었다.길 위에서 신발 하나 먼저 다 닳았다. 꽃진 자리에 잎피었다 너에게 쓰고잎진 자리에 새가 앉았다 너에게 쓴다.너에게 쓴 마음이벌써 내 일생이 되었다.마침내는 내 생生 풍화되었다. (그리움은 돌아갈 자리가 없다, 작가정신) 2017. 2. 3.
백석, 흰 바람벽이 있어 오늘 저녁 이 좁다란 방의 흰 바람벽에 어쩐지 쓸쓸한 것만이 오고 간다 이 흰 바람벽에 희미한 十五燭 전등이 지치운 불빛을 내어던지고 때글은 다 낡은 무명샤쯔가 어두운 그림자를 쉬이고 그리고 또 달디단 따끈한 감주나 한잔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내 가지가지 외로운 생각이 헤매인다 그런데 이것은 또 어인 일인가 이 흰 바람벽에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있다 내 가난한 늙은 어머니가 이렇게 시퍼러둥둥하니 추운 날인데 차디찬 물에 손은 담그고 무 이며 배추를 씻고 있다 또 내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내 사랑하는 어여쁜 사람이 어늬 먼 앞대 조용한 개포가의 나즈막한 집에서 그의 지아비와 마조 앉어 대구국을 끓여놓고 저녁을 먹는다 벌써 어린 것도 생겨서 옆에 끼고 저녁을 먹는다 그런데 또 이즈막하야 어늬 사이엔가 이.. 2016. 12.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