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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리뷰

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by leitz 2018. 3. 19.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비행운이 당연히 飛行雲일 거라 생각했다. 하늘색의 표지를 보기 전에 제목만 먼저 접했을 때에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다.(사실 표지 그림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좋다) (적어도 내게는) 비행운은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어쩐지 애인과 함께 보아야 더 의미 있고 혹은 비행운을 보면 어린 시절 함석지붕 위에 누워 보던 그림같은 풍경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책을 읽는 도중에는 非幸運일 거라 생각했다. 각각의 이야기들에 어떤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려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는 비행운이 飛行雲임을 인정하게 된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보이는,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으로서의 비행운.

 

  사모하던 선배의 갑작스런 연락에 달갑게 찾아간 곳에서 겪게 되는 침통한 방송 출연 이야기를 다룬 <너의 여름은 어떠니>, 남편의 (나의 짐작으론) 외도를 알아채지 못하며 온갖 벌레와 싸우면서도 꿋꿋이 추억을 지키려 애쓰는 임신부의 기괴한 이야기 <벌레들>, 중간에 주인공이 소년이었다는 게 조금 의외였지만(소녀인 줄 알았지) 극한 상황에서 버티는 생명체로서의 소년의 심리 묘사가 좋았던(그러나 너무나 암울하였던) <물속 골리앗>, 택시를 운전하는 문제아(로 여겨지며 살아온) 남자 용대와 조선족 여자와의 쓸쓸한 사랑 이야기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인천공항 화장실 청소를 하는 기옥 씨의 이야기를 사실적으로 다룬 <하루의 축>, 친구 결혼식에 가다 손톱 정비를 하는, 꾸미기에 서툴지만 과연 꾸미는 게 좋기만 한가 생각하게 한 이야기 <큐티클>, 은지와 서윤 두 여자가 방콕과 캄보디아 여행을 하며 겪는 둘이 여행하면 싸운다는 걸 흥미있게 풀어낸 이야기 <호텔 니약 따>, 재수 시절 독서실에서 함께 지낸 언니에게 편지 쓰는 형식으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역시 침통하지만 이해는 가는 이야기 <서른>.

  단편 하나하나가 다 기억에 남는다. 마치 작가는 이런 우울한 이야기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인 존재의 자국이라 말하는 듯하다. 그래서 제목이 적절하다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제 말은요. 그렇게 우연히 노래랑 나랑 만났는데, 또 너무 좋은데, 나는 내려야 하고, 그렇게 집에 가면서, 나는 그 노래 제목을 영영 알지 못하게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때가 있다는 거예요.”

용대가 물었다.

그럼 다 듣고 내리지 그랬어요.”

그녀는 나이답지 않게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런데 감동적인 음악을 들으면요, 참 좋다, 좋은데, 나는 영영 그게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을 거라는, 바로 그 사실이 좋을 때가 있어요.”

(<그곳에 밤 여기에 노래>, 146-147)

마음에 온전히 새기지 못한 좋은 음악, 연락이 닿지 않는 사람, 가보지 못한 곳이 더 기억에 남기도 하는 법이다.

 

그리고 대놓고 말은 안 했지만 본인들이 또래보다 똑똑하다 자부했다. 그 나이 대 젊은이가 자주 하는 오해 중 하나. 혹은 대부분의 인간이 죽을 때까지 하는 착각 중 하나를 그들도 하고 있는 셈이었다.

도대체 인간이 이십대에 총명하지 않으면 언제 총명할 수 있단 말인가?”

취하면 문어체로 말하는 습관이 밴, 늦깎이 복학생 선배가 소주잔을 격하게 내려놓으며 너희들의 총기도 그리 특별한 게 못 된다는 얘길 거듭했을 때도, 두 사람은 비실비실 웃으며 재치 있는 답변만 궁리하고 있었다. 그 누가 어떤 진실을 알려줘도 맞아, 맞는데...... 내 경우엔 아니야라고 믿던 이십대 초반의 일이었다. (<호텔 니약 따>, 250)

  정말로, 이십대 초반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머릿속과 입으론 못할 게 없는.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깨달아간다. 자신에 대해, 자신의 한계에 대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

  <호텔 니약 따>와 <서른>을 특히 재미있게 읽었다. <호텔 니약 따>에서는 어째서 친한 친구와 여행을 하면 싸우게 되는지, <서른>에서는 어째서 보통 사람이 다단계 판매를 하기에 이르는지를 (참으로 범박하게 말하자면) 알 수 있는데 나름 흥미로웠다.

  여기 끄적이는 것은 비망록이라 해도 무방하다. 비평이라 할 수 없다. 어쨌든, 어떤 작품이든, 마음에 들든 들지 않든, 이미 책으로 나왔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어렵사리 쓴 글을 제멋대로 손쉽게 비판하는 짓은 할 짓이 못 된다는 한 선배 말이 떠오른다. 나도 공감한다. 그래서 나는 바짝 엎드려 그 모든 작가들에게 경의를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