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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이/詩22

문태준, 팥배나무 팥배나무 -문태준 백담사 뜰 앞에 팥배나무 한 그루 서 있었네 쌀 끝보다 작아진 팥배들이 나무에 맺혀 있었네 햇살에 그을리고 바람에 씻겨 쪼글쪼글해진 열매들 제 몸으로 빚은 열매가 파리하게 말라가는 걸 지켜보았을 나무 언젠가 나를 저리 그윽한 눈빛으로 아프게 바라보던 이 있었을까 팥배나무에 어룽거리며 지나가는 서러운 얼굴이 있었네 2015. 7. 9.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비가 오려 할 때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맨발, 창비) 절름발이 학수형님이라니... 2015. 7. 7.
문태준, 짧은 낮잠 짧은 낮잠 문태준 낮잠에서 깨어나면나는 꽃을 보내고 남은 나무가 된다 혼(魂)이 이렇게 하루에도 몇번낯선 곳에 혼자 남겨질 때가 있으니 오늘도 뒷걸음 뒷걸음질치는 겁 많은 노루꿈을 꾸었다 꿈은, 멀어져가는 낮꿈은친정 왔다 돌아가는 눈물 많은 누이 같다 낮잠에서 깨어나 나는 찬물로 입을 한번 헹구고주먹을 꼭 쥐어보며 아득히 먼 넝쿨에 산다는 산꿩 우는 소리 듣는다 오후는 속이 빈 나무처럼 서 있다 (맨발, 창비) 2015. 6. 29.
안도현, 양철 지붕에 대하여 양철 지붕에 대하여 -안도현 양철 지붕이 그렁거린다, 라고 쓰면 그럼 바람이 불어서겠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삶이란, 버선처럼 뒤집어볼수록 실밥이 많은 것 나는 수없이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방울이었으나 실은, 두드렸으나 스며들지 못하고 사라진 빗소리였으나 보이지 않기 때문에 더 절실한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양철 지붕을 이해하려면 오래 빗소리를 들을 줄 알아야 한다 맨 처음 양철 지붕을 얹을 때 날아가지 않으려고 몸에 가장 많이 못자국을 두른 양철이 그놈이 가장 많이 상처입고 가장 많이 녹슬어 그렁거린다는 것을 너는 눈치채야 한다 그러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증발하기 쉬우므로 쉽게 꺼내지 말 것 너를 위해 나도 녹슬어가고 싶다, 라든지 비 온 뒤에 햇볕 쪽으로 먼저 몸을 말리려고 뒤척이.. 2015. 6. 23.
박정대, 장마 장마 -박정대 여름 내내 방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정리되지 못한 추억의 일부에서도 여전히곰팡이 냄새는 났다 방법서설에서부터 고리끼 단편 소설선까지 책들이 익어가는 동안 기억의 다락방을 열면 거미줄 아름답게 빛났다 기억이 아름다울 수 있는 건 스스로 만든 廢鑛 속에서 빛나는 거미줄을 꿈꿀 수 있기 때문, 이라고그 여름 장마 속에서 누군가에게 나는쓴 것 같다 2015. 6. 10.
이창기, 심경心境 11 심경心境 11 _하물며 네가 떠난 뒤에야 이창기 동지섣달 추위에 애지중지 키운 강아지 여섯 마리 중 한 마리는 잃어버리고 두 마리는 남 주고 이렇게 저렇게 다 떠나고 마침내 혼자 남아 입춘 경칩을 제멋대로 쏘다니는 봄 강아지 한 마리 그 곁에 가면 물씬 풍기는 어미 개 냄새 너, 알지? 2015. 6. 6.
이동순, 흘러간 날 흘러간 날 -이동순 그대와 마주 앉아서 해가 아주 저물어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브 몽땅이나 줄리에뜨 그레꼬의 샹송을 들었던 저녁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음악도 꺼지고 길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 밝아올 때도 우리는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어느 흘러간 날이 있었습니다 (꿈에 오신 그대, 문학동네) 2015. 6. 6.
최두석, 매화와 매실 매화와 매실-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봄에는 매화나무라 부르고여름에는 매실나무라 부른다고 한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사) 2015. 6. 6.
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나무도 돌도 잊고아주 넓은 등에 기대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15. 6. 6.
박철, 반듯하다 반듯하다_후배 K에게 -박철 나도 이제 한마디 거들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한마디 하마시를 쓰려거든 반듯하게 쓰자곧거나 참되게 쓰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기 앞에 설 때우뚝하니,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멋쩍어서일부러, 어거지로, 더욱 어색하게셔터가 울리길 기다리며 몸을 움직인다말 그대로 모션을 취하는 것이다 차라리 반듯하게 서자촌스럽게, 어색하게, 부끄럽게뻣뻣하게 서서 수줍으면 좀 어떠랴이런 말 저런 이름 끌어다 얼기설기 엮어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아닌 모션 취하지 말고그냥 반듯하고 쉽게 쓰자 201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