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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Band's Visit 어쩌면...이런 게 당신 협주곡의 피날레 아닐까요?트럼펫과 바이올린의 거창한 합주가 아니라이런 일상의 평범함으로 끝을 맺는 거죠.슬프지도 행복하지도 않게그냥조그만 방과램프침대잠자는 아기그리고...묵직한 고독감으로. 2015. 6. 6.
Karakul Aug 2011 / Xinjiang China / GF1 2015. 6. 6.
이창기, 심경心境 11 심경心境 11 _하물며 네가 떠난 뒤에야 이창기 동지섣달 추위에 애지중지 키운 강아지 여섯 마리 중 한 마리는 잃어버리고 두 마리는 남 주고 이렇게 저렇게 다 떠나고 마침내 혼자 남아 입춘 경칩을 제멋대로 쏘다니는 봄 강아지 한 마리 그 곁에 가면 물씬 풍기는 어미 개 냄새 너, 알지? 2015. 6. 6.
이동순, 흘러간 날 흘러간 날 -이동순 그대와 마주 앉아서 해가 아주 저물어버린 날이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브 몽땅이나 줄리에뜨 그레꼬의 샹송을 들었던 저녁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이 흘러서 음악도 꺼지고 길거리의 가로등이 하나 둘 밝아올 때도 우리는 불을 켜지 않고 어둠 속에서 서로를 가만히 바라보던 어느 흘러간 날이 있었습니다 (꿈에 오신 그대, 문학동네) 2015. 6. 6.
최두석, 매화와 매실 매화와 매실-최두석 선암사 노스님께꽃이 좋은지 열매가 좋은지 물으니꽃은 열매를 맺으려 핀다지만열매는 꽃을 피우려 익는다고 한다매실을 보며 매화의 향내를 맡고매화를 보며 매실의 신맛을 느낀다고 한다 꽃구경 온 객도 웃으며 말한다매실을 어릴 적에는 약으로 알고자라서는 술로 알았으나봄을 부르는 매화 향내를 맡고부터는봄에는 매화나무라 부르고여름에는 매실나무라 부른다고 한다. (꽃에게 길을 묻는다, 문학과지성사) 2015. 6. 6.
이병률, 아주 넓은 등이 있어 아주 넓은 등이 있어-이병률 종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나무를 잘 다루는 사람이고 싶다가한때는 돌을 잘 다루는 이 되고도 싶었는데이젠 다 집어치우고 아주 넓은 등 하나를 가져달(月)도 착란도 내려놓고 기대봤으면 아주 넓고 얼얼한 등이 있어가끔은 사원처럼 뒤돌아봐도 되겠다 싶은데 오래 울 양으로 강물 다 흘려보내고손도 바람에 씻어 말리고 내 넓은 등짝에 얼굴을 묻고한 삼백년 등이 다 닳도록 얼굴을 묻고 종이를 잊고나무도 돌도 잊고아주 넓은 등에 기대한 시절 사람으로 태어나한 사람에게 스민 전부를 잊을 수 있으면 (바람의 사생활, 창비) 2015. 6. 6.
박철, 반듯하다 반듯하다_후배 K에게 -박철 나도 이제 한마디 거들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한마디 하마시를 쓰려거든 반듯하게 쓰자곧거나 참되게 쓰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기 앞에 설 때우뚝하니,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멋쩍어서일부러, 어거지로, 더욱 어색하게셔터가 울리길 기다리며 몸을 움직인다말 그대로 모션을 취하는 것이다 차라리 반듯하게 서자촌스럽게, 어색하게, 부끄럽게뻣뻣하게 서서 수줍으면 좀 어떠랴이런 말 저런 이름 끌어다 얼기설기 엮어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아닌 모션 취하지 말고그냥 반듯하고 쉽게 쓰자 2015. 6. 6.
이정록, 뒷짐 뒷짐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밀쳐놓은 빈손 위에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2015. 6. 6.
이문재, 개똥벌레 개똥벌레_이문재 뭉클, 솟아나는 저 여름 산진초록, 원근은 편안하고 자욱하다너는 한낮의 가로등처럼 없는 듯있었는데, 기실 저녁도 알고 보면 동쪽에서오는 것이었는데, 그림자 자작자작 밟으며동쪽에서 오는 거였는데, 꿈뻑 어미 소처럼 가로등 불 들어오고3번 국도 휴게소에서 저물 녘 발간가로등을 마주친다, 울컥저녁은 옛일을 데불고 와서 마악생겨나는 어둠을 좌악 펼친다쉼표처럼 반딧불이 켜진다가로등에서 너는 반딧불로 몸 바꿔내 잘못에 따끔따끔 침을 놓고 있구나 원근이 사라지면 불안하다저녁은 동쪽에서 오는 것, 옛일도옛날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가로등 불 자꾸만 밝아진다 (산책시편, 민음사) 201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