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산이/詩

장석남, 가을볕

by leitz 2018. 10. 2.

 

가을볕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이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산이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효근, <어머니의 힘>과 <빈집>  (0) 2018.10.16
장석남, 三월이 오고  (0) 2018.03.20
복효근, 매미  (0) 2017.08.03
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0) 2017.07.20
이문재, 봄날  (0) 2017.04.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