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볕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이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산이 >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효근, <어머니의 힘>과 <빈집> (0) | 2018.10.16 |
---|---|
장석남, 三월이 오고 (0) | 2018.03.20 |
복효근, 매미 (0) | 2017.08.03 |
문정희, 혼자 가질 수 없는 것들 (0) | 2017.07.20 |
이문재, 봄날 (0) | 2017.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