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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반듯하다 반듯하다_후배 K에게 -박철 나도 이제 한마디 거들 나이가 되었는지 모르겠다만 한마디 하마시를 쓰려거든 반듯하게 쓰자곧거나 참되게 쓰자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사진기 앞에 설 때우뚝하니, 반듯하게 서 있는 것이 멋쩍어서일부러, 어거지로, 더욱 어색하게셔터가 울리길 기다리며 몸을 움직인다말 그대로 모션을 취하는 것이다 차라리 반듯하게 서자촌스럽게, 어색하게, 부끄럽게뻣뻣하게 서서 수줍으면 좀 어떠랴이런 말 저런 이름 끌어다 얼기설기 엮어이런 것도 저런 것도 아닌 모션 취하지 말고그냥 반듯하고 쉽게 쓰자 2015. 6. 6.
이정록, 뒷짐 뒷짐 -이정록 짐 꾸리던 손이작은 짐이 되어 등 뒤로 얹혔다가장 소중한 것이 자신임을이제야 알았다는 듯, 끗발 조이던오른손을 왼손으로 감싸 안았다세상을 거머쥐려 나돌던 손가락이제 등을 넘어 스스로를 껴안았다젊어서는 시린 게 가슴뿐인 줄 알았지등 뒤에 두 손을 얹자 기댈 곳 없던 등허리가아기처럼 다소곳해진다, 토닥토닥어깨 위로 억새꽃이 흩날리고 있다구멍 숭숭 뚫린 뼈마디로도아기를 잘 업을 수 있는 것은허공 한 채 업고 다니는 저 뒷짐의둥근 아름다움 때문이 아니겠는가밀쳐놓은 빈손 위에무한 천공의 주춧돌이 가볍게 올라앉았다 2015. 6. 6.
이문재, 개똥벌레 개똥벌레_이문재 뭉클, 솟아나는 저 여름 산진초록, 원근은 편안하고 자욱하다너는 한낮의 가로등처럼 없는 듯있었는데, 기실 저녁도 알고 보면 동쪽에서오는 것이었는데, 그림자 자작자작 밟으며동쪽에서 오는 거였는데, 꿈뻑 어미 소처럼 가로등 불 들어오고3번 국도 휴게소에서 저물 녘 발간가로등을 마주친다, 울컥저녁은 옛일을 데불고 와서 마악생겨나는 어둠을 좌악 펼친다쉼표처럼 반딧불이 켜진다가로등에서 너는 반딧불로 몸 바꿔내 잘못에 따끔따끔 침을 놓고 있구나 원근이 사라지면 불안하다저녁은 동쪽에서 오는 것, 옛일도옛날에서 오는 게 아니었다, 이렇게 도처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가로등 불 자꾸만 밝아진다 (산책시편, 민음사) 2015. 6.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