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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남, 가을볕 가을볕 우리가 가진 것 없으므로 무릎쯤 올라오는 가을풀이 있는 데로 들어가 그 풀들의 향기와 더불어 엎드려 사랑을 나눈다고 해도 별로 서러울 것도 없다 별 서러울 것도 없는 것이 이 가을볕이로다 그저 아득히만 가는 길의 노자로 삼을 만큼 간절히 사랑은 저절로 마른 가슴에 밀물 드는 것이니 그 밀물의 바닥에도 숨죽여 가라앉아 있는 자갈돌들의 그 앉음새를 유심히 유심히 생각해볼 뿐이다 그 반가사유를 담담히 익혀서 여러 천년의 즐거운 긴장으로 전신에 골고루 안배해둘 뿐이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얼마 없으므로 가을 마른 풀들을 우리 등짝 하나만큼씩만 눕혀서 별로 서러울 것 없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창비, 2001. 2018. 10. 2.
김애란, 『바깥은 여름』 김애란, 『바깥은 여름』, 문학동네, 2017. , , , , , , 등 7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지난번에 읽었던 『비행운』과 마찬가지로 무거운 이야기들을 펼치고 있는데 『비행운』이 한없이 육중하게 가라앉는 느낌이라면(무거운 소설집으로는 김숨의 『국수』를 빼놓을 수 없지만) 이 소설집은 탄탄한 무게감을 갖고 보다 매끄러운 동선을 그리며 순항하는 느낌이다. 문장도 보다 정련된 느낌이다. 소설집의 첫 부분을 묵직하게 열어젖히는 . 내가 짐작할 수 없는 '아픔'을 어쩐지 알 것만 같도록 담고 있는 소설. 복분자 병의 폭발과 그 장면 묘사가 참으로 불편하게 리얼했다. 은 역시 시큼한 소설. 아이의 심리, 여름 풍경 모두 잘 담아내고 있다. 나는 그저 여러 편 중에서 소재가 재미나네, 하며 읽은 작품이 인데.. 2018. 8. 10.
아쿠타카와 류노스케 단편집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단편집』, 김명주 옮김, 지식을만드는지식, 2012. 모두 세 편으로 되어 있다. , , 가 그것이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는 일본 근대 문학의 '챔피언'이란다. 은 영주에게 속해 있는 화원 요시히데의 이야기다. 당대 제일의 화원이면서도 눈으로 직접 보지 않고는 그리지 못하는 - 그 말인즉슨 직접 눈으로 본 것은 생생하게 그릴 수 있다는 말이다. 그에게는 외동딸이 있었는데 영주가 딸을 총애하여 궐내에 머물게 한다. 영주의 명에 의해 '지옥변'을 그리게 된 요시히데는,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온갖 것들을 대부분 그려두고 마지막 부분을 그리지 못해 고민하다 영주를 찾는다. 나머지 부분은 그릴 수 있었지만 불타는 가마 속 여인을 도무지 그리지 못하.. 2018. 7. 17.
[영화] 우동.UDON.2006 진짜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사람이라면 음식이 영혼을 온통 따스하게 해줄 수도 있음을 알 것이다. 우동도 그런 음식이다.(영화에서는 soul food라 칭했건만) 나도 카가와 지역에 갔다가(거기가 우동이 유명한 줄도 모르고 갔었는데) 그곳에서 먹은 우동이 잊히질 않는다. 일본인 친구의 말에 따르자면, 사누키 지역(오늘날의 카가와 지역)에 가서 우동을 먹으면 웬만하면 맛있다고 한다. 에이, 아무려면 그럴 수가 있어? 하는 생각을 했었는데 영화를 보니 과연 그럴 만도 하다고 납득하게 되었다. 제면소 집 아들 고스케, 늘 무표정한 얼굴로 한 번도 웃는 얼굴을 보인 적 없이 우동 면을 만드는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불만을 품고 사람들을 웃기겠다는 일념으로 미국에 간다. 그러나 실패. 멋쩍게 고향에 돌아와 지역 .. 2018. 7. 9.
톰 씨와 함께한 산속의 나날들(Mountain days with Tom-san, 2015) 영화 에 나왔던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별일 없이 시골살이를 하는 소소한 이야기를 다룬 여름 영화. 어느 날 쥐들이 소란을 피우자 고양이를 들이게 되는데 그 고양이 이름이 톰 씨다. 고바야시 사토미 씨가 주연을 맡았고잡화점 주인 할머니로 나온 모타이 마사코 씨도 오랜만에 반가웠다. 뭐 별로 재미있지는 않지만 틀어놓고 시간 보내기 좋은 영화. 2018. 6. 23.
원탁의 가족(The Round Tabel, 2014) 아이들의 세상은 어른들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뭐 그런 영화.아주 오래 전 보았던 과 분위기가 비슷했지만상상력은 이 훨씬 뛰어난 것 같다. 별로 재미있게 보진 못한 영화.참, 영화 속에 자이니치 박군이 나오는데, 박군의 엄마 이름이 토모미[朋美, 붕미]다. 주인공 꼬마가 토모미를 한국어로 '붕미'라 읽는다는 걸 알고 마침 이름이 토모미인 자기 언니에게'붕미'라고 불러보기도 했다. 그나저나 북미관계가 앞으로도 주욱 좋아졌으면 좋겠다. 2018. 6. 15.
순전히 주관적인 일본드라마 순위(계속 업데이트) 이하는 순전히 나의 취향에 따른 소개와 별점임을 밝혀둔다. 순서는 별점과는 무관하다. 빨간색 강력 추천 초록색 추천 노란색 심심풀이 보라색 시간 낭비 1. (北の国から) 1981.10.9 - 2002.9.7 일본 후지TV 출연 : 쿠니에 타나카(고로), 요시오카 히데타카(준), 나카지마 토모코(호타루) 최고의 일본 드라마. 본방송은 1981년 10월 9일부터 1982년 3월 26일까지 방영되었지만 이후 스페셜이 간간이 제작되어 2002년까지, 무려 20년 넘게 이어간 드라마. 주인공들이 나이가 들어가는 채로, 그러니까 20년 넘게 계속 출연한 드라마. 주인공들이 드라마를 위해 이렇게 오래 출연하였다는 것도 경이롭지만, 스토리 자체도 참 아름다웠다. 드라마 속에서 준으로 분한 요시오카 히데타카나 호타루로 .. 2018. 4. 23.
[일드] 뷰티풀 라이프 일본 TBS 드라마 / 11부작 / 2000.01.16-3.26 출연 : 기무라 타쿠야, 토키와 타카코 원인 모를 병에 걸려 걷지 못하게 된, 휠체어를 탄 스물일곱의 교코, 언제 병이 악화되어 죽을지 모르는 상황에서도 도서관에서 일하며 제법 명랑하게 살아가는 그녀. 의사 집안에서 집안의 기대에 부응치 아니하고 자신의 재능을 살려 미용실에서 일하는 순결하고 강한 슈지, 이 둘의 사랑 이야기. 능력을 인정받는 미용사 슈지가 우연히 도서관에서 만난 교코를 헤어 모델로 점찍어 작업을 시작하면서부터 둘의 관계는 진전되고, 결국 둘의 사랑이 깊어졌을 무렵 교코의 난치병이 악화되어 죽게 된다는 이야기. 시한부 인생을 사는 한편과의 연애 영화나 드라마는 이미 식상해져버린 소재지만 그런 식상함에 묻히지 않고 이야기를 과.. 2018. 4. 19.
장석남, 三월이 오고 三월이 오고 장석남 3월이 오고 또 저녁이 오네 열두 겹으로 사랑이 오네 물 이랑이 밀고 오는 것, 물 이랑이 이 江岸을 밀어서 내 앉은 자리를 밀어서 나를 제 어깨에 초록으로 앉히고는 일어서 가는데 불이 한 점이 켜지고 또 꺼지고 목련이 정수리에서부터 피어 내려오는데 처음의 서늘한 입맞춤이 조금씩 더워지고 더워지고 3월이 오고 꽃밭마다 꽃이 와 앉고 잎이 솟고 솟고 열두 겹 사랑이 오네 조금 더 작아져서 살아갈 일을 우리는 이마에 물들이네 초록 이마로 물들이네 2018. 3. 20.
김애란, 『비행운』, 문학과지성사, 2012. 책을 다 읽고 나서 제목을 참 잘 지었다는 생각을 했다. 책을 읽기 전에는 ‘비행운’이 당연히 ‘飛行雲’일 거라 생각했다. 하늘색의 표지를 보기 전에 제목만 먼저 접했을 때에도 당연히 그리 생각했다.(사실 표지 그림을 조금 자세히 살펴보는 것도 좋다) (적어도 내게는) 비행운은 낭만적인 이름이었다. 어쩐지 애인과 함께 보아야 더 의미 있고 혹은 비행운을 보면 어린 시절 함석지붕 위에 누워 보던 그림같은 풍경이 서려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책을 읽는 도중에는 ‘非幸運’일 거라 생각했다. 각각의 이야기들에 어떤 불행의 그림자, 같은 것이 어려 있는 것 같아서였다.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다 읽고 나서는 비행운이 ‘飛行雲’임을 인정하게 된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 2018. 3. 19.